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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7-26 11:57
[국내] '필리핀의 탁구엄마' 권미숙, 눈물 닦고 시즌2
 글쓴이 : 뉴스타임
 
얀얀(왼쪽)과 권미숙 감독.


# INTRO - 시즌1 ‘하늘나라로 간 얀얀’

2016년부터 탁구의 오지(奧地)인 필리핀에서는 젊은 탁구선수 한 명이 환희와 감동, 그리고 깊은 슬픔을 안겼다. 매번 필리핀 현지에서 큰 화제가 된 것은 물론, 한국을 비롯한 세계탁구계가 함께 기뻐하고 슬퍼했다.

주인공은 1994년생 얀얀(이안 라리바의 애칭). 국가대표 훈련장에 탁구대 2대가 놓여 있는, 열악한 필리핀 탁구환경에서 얀얀은 2016년 4월 홍콩에서 열린 올림픽 아시아예선을 통과했다. 세계랭킹 400위권의 선수가 일으킨 기적. 필리핀 탁구선수의 첫 올림픽 진출이었기에 큰 화제가 됐다. 얀얀이 2016 리우 올림픽에서 필리핀 선수단의 기수를 맡을 정도였다.

2017년 1월 감기인 줄 알고 병원에 갔던 얀얀은 급성 백혈병 판정을 받았다. 탁구스타라고는 하지만 경제사정이 좋지 않은 필리핀에서 7,000만 원의 수술비는 큰 부담이었다. 유승민 IOC위원이 급히 성금을 마련해 필리핀으로 날아가고, ITTF가 나서는 등 3,000만 원을 도왔다. ‘필리핀의 탁구영웅’은 수술을 잘 받고, 회복에 들어갔다. 그런데 2018년 9월초 얀얀은 수혈을 잘못받아 갑작스레 세상을 뜨고 말았다.

필리핀 남자탁구 대표선수단이 지난 23일 천안의 보람할렐루야탁구단에서 합동훈련을 하다가 기념사진을 찍었다. 맨오른쪽이 권미숙 감독, 가운데가 권 감독과 동기인 오광헌 보람탁구단 감독.


# 필리핀의 탁구엄마

쾌거-발병-탁구인들의 도움-갑작스런 죽음. 얀얀의 감동스토리에는 한국인 권미숙 감독(49)이 있다. 사실 권 감독의 이야기도 드라마 같다. 경북 영양 출신으로 시골의 초등학교에서 일반학생으로 탁구를 했다. 재능이 있었던 것 같다. 4학년 때 소년체전 도대표로 선발됐다. 바로 탁구부가 있는 학교로 스카우트됐고, 탁구명문 경주의 근화여중고를 졸업하고 최고의 실업팀인 제일모직에 입단했다. 국가대표로 1989년 도르트문트 세계선수권에서는 헌정화 홍차옥 등과 함께 단체전 은메달을 땄다.

화려한 선수생활은 갑자기 끝났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앞두고 국가대표 선발전을 1위(전승)로 통과했지만 태극마크를 반납했고, 이후 24살의 나이에 은퇴했다. 여기에는 사연이 많지만 아직도 현직에 있는 탁구인들이 많은 까닭에 권 감독은 내막을 밝히고 싶지 않아 한다. 이후 주니어 및 생활체육 지도자로 하다가 2013년 4월 딸의 교육을 위해 필리핀 이주를 결정했다.

“당시 딸이 초등학교 5학년이었는데 탁구를 하다가 그만 뒀어요. 운동하느라 공부를 소홀히 했기에 영어라도 하나 제대로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에 필리핀행을 결정했지요. 필리핀 마닐라에 정착하기 시작했는데, 역시 탁구에 관심이 가더라고요. 무작정 대표선수들이 훈련을 한다는 탁구장으로 찾아갔고, 여기서 아무 조건 없이 선수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어요. 그때 19살의 얀얀, 그리고 15살의 잔잔(잔 나이레)을 만났지요.”

얀얀의 올림픽 진출로 권미숙 감독은 필리핀에 꽤 유명해졌다. 2달 동안 매일 신문에 난 것 같고, 어디를 가도 사람들이 먼저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지금까지 두테르테 대통령도 2번 만났고, 만날 때마다 5,000달러씩 격려금도 받았다(부패가 심한 까닭에 실제 받은 것은 2,000달러).

권 감독은 딸이나 다름없었던 얀얀이 세상을 떠난 후 충격을 받았다. 그렇지 않아도 너무 힘들어서 대표팀 감독에서 물러나려고 했는데, 백혈명 투병 중에서도 하루 30분씩 라켓을 잡았던 얀얀이 허망하게 떠나자 의욕이 사라졌다. 실의에 빠져 있는데 이번엔 잔잔(2000년생)이 찾아와 ‘엄마!“라며 울면서 매달렸다. ”나도 얀얀처럼 올림픽에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2018 마닐라 오픈 때 단상에 올라 팬들에게 소개되고 있는 권미숙 감독(오른쪽)과 잔잔(가운데).


# 시즌2는 잔잔과 진짜딸

필리핀 탁구엄마의 시즌2는 ‘얀얀의 시즌1’에 비해 외적인 사정은 조금 나아졌다. 지난 1월부터 대표팀 감독 월급이 나오기 시작했다. 선수는 남녀 5명씩, 모두 10명. 연습장은 아직도 마닐라의 탁구대 2대인 예전 그곳이지만, 필리핀체육회가 오는 8월부터 앙헬레스(클라크)에 대표팀트레이닝센터를 오픈하면서 곧 좋은 환경에서 운동하게 된다.

이는 권 감독의 필리핀 탁구가 계속 성장했기 때문이다. 나름 해당지역에서는 큰 비중이 있는 동남아시아경기대회에서 금메달(2017)을 따고, 유스올림픽(2018, 잔잔)에 출전하는 등 필리핀 탁구는 태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말레시이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동남아시아의 다크호스가 됐다. 올해 12월에는 제30회 동남아시아경기대회가 마닐라에서 열리고, 내년에는 도쿄 올림픽이 있는 까닭에 관심은 더욱 높다.

잔잔은 현재 세계랭킹 477위다. 예전 얀얀과 비슷하다. 경제적 사정으로 국제대회 출전이 적기 때문이지, 실력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잔잔은 얀얀처럼 권 감독을 공석에서는 “코치”라고 부르지만, 사석에서는 “엄마”라고 부르며 탁구에 모든 걸 걸고 있다. 부모와 누나가 미국으로 떠났기에 권 감독의 집에서 살다시피 하고 있다.

그리고 권 감독의 시즌2에는 한 명이 더 있다. 권 감독의 필리핀행에 원인이 됐던 외동딸 한송희(16)다. 현재 필리핀에서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한송희는 한국에서 포기했던 탁구를 필리핀에서 다시 시작했다. 처음에는 취미 삼아 필리핀에서 탁구채를 잡았는데, 점점 더 탁구에 빠져들었고 지금은 필리핀 여자선수로는 실력이 가장 좋다. 이중국적이 가능한 까닭에 곧 필리핀 국적을 획득하면 필리핀 선수로 올림픽 등 국제대회에 나갈 생각이다.

왼쪽부터 한송희, 잔잔, 권미숙 감독.


# OUTRO - 한국에서는 '못난 사람'

권미숙 감독과 잔잔, 한송희 등을 포함한 필리핀 국가대표팀은 지난 7월 1일부터 한국에서 전지훈련 중이다. 9월 9일까지 100일 간의 일정이다. 필리핀 형편이 워낙 좋지 않아, 한국 탁구인들의 도움을 받고 있다. 지금은 대전 한남대와 천안의 보람할렐루야탁구단을 오가며 훈련을 하고 있다.

“저 한국에서 아주 못난 탁구인이에요. 보는 선후배마다 도와달라고 부탁하기 바쁘거든요. 탁구인들뿐 아니라 친분이 있는 생활체육쪽 지인들도 옷가지나 탁구용품을 모아 보내주곤 해요. 얀얀 때도 그렇게 큰 신세를 졌는데, 지금도 그래요. 너무 고맙고, 또 한편으로 매번 도와달라고만 하니 면목이 없지요.”

이번 한국 전지훈련도 그렇다. 필리핀에서 받아온 비용은 물가가 높은 한국에서는 어림도 없다. 한남대가 8월 27일까지 숙소와 연습장 등을 후원했다. 중간중간 동기인 오광헌 감독이 있는 보람할렐루야탁구단의 도움을 받았다. 그런데 8월 28일 이후 2주간이 문제다. 남자는 보람탁구단이 흔쾌히 합숙훈련을 도와주기로 했는데, 여자선수 5명이 갈 곳이 없다. 함께 연습할 수 있는 팀은 권 감독이 탁구인들에게 부탁해 섭외할 수 있지만, 300만 원에 달하는 숙소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다.

“어디 공공시설이라도 여자선수들이 2주 정도 머무를 곳이 없을까요?” 필리핀의 탁구엄마는 울림이 큰 스토리와는 별개로 늘 한국에 미안하기만 하다. [헤럴드경제 스포츠팀(천안)=유병철 기자]

필리핀 국가대표 잔잔이 보람탁구단의 최인혁과 연습경기를 하고 있다. 뒤쪽에서 지켜보는 이가 권미숙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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